In Dust

카파도키아(갑바도기아) 교부들

니케아 공의회에서 분명한 결론을 내렸음에도 아리우스주의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373년 세상을 떠난 후, 출신지를 따라 '카파도키아(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라고 불리는 카이사리아(가이사랴)의 바실Basil, 그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바실의 동생인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y는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위대한 자취를 남겼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들도 성령도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가 아니며, 동등한 본질을 공유한다고 선언하면서 성자의 신성을 확정하고 성령의 신성을 선포했습니다.

 

바실은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테네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습니다. 356년 학업을 마친 바실은 고향 카이사리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속적인 직업을 택하는 대신 누이의 조언을 따라 금욕적인 삶을 택했고, 마침내 370년 카이사리아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바실은 성령에 대해 다룬 책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 책에서 성령의 온전한 신성을 옹호했습니다. 때문에 그에게는 '성령의 신학자'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그리스 정교 수도사들은 지금도 그가 제시한 수도사적 삶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381년 공의회에서 자신의 견해가 수용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37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죽음 이후에 널리 퍼졌고, 그는 성 바실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의 강권에 떠밀려 주교직을 맡긴 했지만 워낙 수줍음이 많고 학문적인 사람이어서 홀로 연구하고 집필하는 호젓한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가 쓴 책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설득력 있게 변론하면서 교회가 다가올 공의회를 준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무렵 성 바실이 세상을 뜨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레고리우스가 잠시 공의회를 이끌도록 명했습니다. 하지만 비난이 거듭되었고, 아리우스파도 위협을 멈추지 않자 결국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5세기부터 사용된 니케아 신경의 문구는 그레고리우스가 이끈 공의회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사임한 뒤 390년 가족 영지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정규 교육 대신 형 바실에게 교육 받았습니다. 바실이 죽은 후, 그레고리우스는 형의 뒤를 이어 삼위일체 정통 교리를 지켜냈습니다. 학자이자 신비주의자였던 그는 동방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신비주의적 전통을 형성하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헬라 철학을 이용해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내고자 했던 그레고리우스는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특히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개회 연설을 통해 이 공회가 니케아 공의회와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했으며, 공의회의 결론 일부를 기록함으로써 큰 기여를 했습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교회가 교리적으로 아리우스주의를 멀리하고, 성령과 성자의 신성을 인정하고 명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자료출처 : 기독교 역사 100장면

 

1 comment for “카파도키아(갑바도기아) 교부들

  1. Mickey Lee
    2017/10/22 at 11:26 PM

    일반적인 서적들에서는 바실이 379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77년으로 기록하셨을 경우 참고 도서를 알려주시면 이후 연구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자료를 잘못 인용하신 것이라면 379년으로 정정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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