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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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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목사이자 신학자, 교육가,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마슬루이스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레이든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카이퍼는 개신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카이퍼는 당시 교회가 직면한 핵심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두 세계관이 벌이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즉 인간과 인간의 지식, 인간의 능력에 입각한 세계관과 오직 그리스도 한 분께만 복종해야 한다는 세계관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세속주의와 기독교, 이 두 체제가 모든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협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가 주장했던 논리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인이시라면 사회와 문화, 사고의 모든 영역까지도 그분께 속했고, 그분이 이것을 다스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지성과 경건함을 가졌던 카이퍼는 세계관이 충돌하는 거대한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 위에 네덜란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신칼빈주의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다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갖췄던 카이퍼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을 설립하고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노조를 설립했으며, 세계 최초로 기독민주당 Christian Democratic Party을 창당했습니다. 1901~1905년까지는 네덜란드 수상직을 역임했습니다.

 

카이퍼는 모든 세계관이 믿음으로 받아들인 일련의 가정과 추측에서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문화와 문서, 운동은 분석 가능한 세계관에 기초를 둡니다. 그렇다면 그 세계관에서 타당성 혹은 오류를 밝혀내기 위해 논리적으로 극단까지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극한의 끝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세계관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카이퍼는 신학과 교육, 정치계에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기며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를 부흥시켰습니다. 또한 1898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열린 스톤 강좌를 통해 북미 지역에 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이퍼의 사상은 20세기 유럽의 헤르도만 도예베르트 Herman Dooyeweerd와 미국의 코넬리우스 반틸 Cornelius Van Til을 통해 한층 더 발전했습니다. 카이퍼에게 영향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그리스도인 수백만에게 세계관을 인식하는 방법과 문화 분석법을 소개한 프랜시스 세퍼 Francis Schaeffer입니다.

 

카이퍼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사고하는 방식과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이 세속주의 세계관으로 대체도리 때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예견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국과 유럽이 마주한 현실을 개탄합니다. 하지만 카이퍼는 100년 전에 이미 이를 예견하고,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힘썼습니다.

 

자료출처 : 기독교 역사 100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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