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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Pelagius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죄론과 구원론을 반대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무엇이고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지만 펠라기우스가 직접 기술한 자료는 구할 수 없다.
그가 이단으로 단죄된 후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를 반대하는 자료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어 이를 통해 그의 주장을 추측할 수 있다.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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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Pelagius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느슨해지는 데 반발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펠라기우스는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자유를 주어 선을 선택하고 완성할 수 있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하느님이 금지한 행위, 피할 자유가 있었던 그런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그러한 자유가 없다면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이 정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를 냉엄한 도덕주의로 환원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는 교회의 평범한 성례전이나 예배행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는 세례를 베풀어 '죄를 씻어왔고', 유아도 아담의 죄를 이어받았다고 하여 세례를 주었다.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담의 범죄가 인류 전체에게 사망을 가져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죄의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이미 서방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가 공개적으로 원죄를 부인했을 때,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단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가 발을 빼자 교황 조지무스(417~418 재위)는 전임자 인노켄티우스 1세가 내린 단죄를 번복했다. 

그러다가 418년 봄, 아프리카의 주교들이 이단자를 추방하는 칙령을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얻어내자 조지무스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가 단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본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논쟁이 있기 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와 은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합리적 설명을 교회가 완전히 받아들인 적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이며, 아담의 죄란 창조 질서 속에서 인간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 자신의 질서마저 혼란하게 되어 육이 영에 대적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와 벌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것은 성교를 통해 출생한 점에서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성적 충동이란 영이 육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말년에 에클라눔의 펠라기우스주의자 주교 율리아누스가 치명타를 가한 것이 바로 원죄를 성교와 연결시킨 부분이다. 
그는 인간의 피조된 본성에 속하는 본능은 도덕적으로 중립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로 되돌아갔다고 공격하면서 싸워 이겨야 할 충동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데서 인간타락의 의미를 찾았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떠나 인간은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되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타락했으며 자기의지로는 타락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영이 육에 예속되었으므로 인간은 노예이며, 그러한 노예의지는 구원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죄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것이 성육신과 오순절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한편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 속에서 도덕적인 빛을 필요한 대로 모두 얻었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를 타고난 것으로 보는 관점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 힘으로 보는 펠라기우스주의의 관점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행위도 그 행위자의 상황에 따라 많이 좌우됨을 지적하면서, 
똑같은 행위를 했어도 주체가 누군지, 어떤 목적으로 했는지, 어떤 감정으로 했는지 따위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옳은 것을 기뻐하는 마음 없이는 좋은 일을 하는 데 참자유가 없고 노예처럼 율법에 끌려다닌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자료출처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4a2004b009

이미지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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